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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border="0" width="100%" cellspacing="0" cellpadding="0"> <tbody> <tr> <td align="center"> <div id="ND_Warp"> <table border="0" width="960" cellspacing="0" cellpadding="0"> <tbody> <tr> <td> <div id="article-wrap"> <h1 class="headline border-box"><span class="headline-title">탈주의 이유<!--/CM_TITLE--></span></h1> <div id="head-info" class="headline-info border-box"> <div class="info"> <ul> <li class="name">김기덕</li> <li class="date">승인 2019.07.23 08:00</li> </ul> </div> <div class="option"></div> </div> </div></td> </tr> </tbody> </table> <div id="article-control"> <table border="0" width="960" cellspacing="0" cellpadding="0"> <tbody> <tr> <td valign="top" width="630"> <div id="article-wrap"><!-- content --> <div class="content border-box"> <div id="articleBody" class="cont-body"> <table border="0" width="200"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right"> <tbody> <tr> <td width="10"></td> <td align="center"><img src="http://www.labortoday.co.kr/news/photo/201907/159551_72672_1938.jpg" alt="" width="200" border="1" /></td> <td width="10"></td> </tr> <tr> <td colspan="3"><span style="color: #000000">▲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span></td> </tr> </tbody> </table> <b>1.</b> AI, 4차 산업혁명, 초결합사회…. 뭔가 다른 새 세상이 올 것처럼 시끄럽다. 거기서 노동의 존재형태도 오늘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전환돼 더는 오늘의 형태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 양 호들갑스럽다. 그래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노동법 등 기존 법질서로는 대응할 수가 없다고 야단이다. 노동자권리도 더는 그대로는 어렵다고 주장하고, 노동운동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지금의 노동체제는 지속가능하지 않게 됐다고 친노동이든 친자본이든 이구동성이다. 하지만 어쩌나. 50년 넘게 살아왔는데도 내게는 오늘도 새롭지 않은 날만 계속되고 있다. 딴 세상에라도 온 것처럼 법석을 떨어 대도 어제가 오늘인 세상이 변함 없이 흘러만 가고 있다. 비정규 노동, 공유경제와 플랫폼 노동, 외주화…. 모습은 새롭지만, 결코 새롭지 않다. 시끄러워도, 뭐라 해도 새 세상은 아니다. <b>2.</b> 인간의 역사에서 노동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 노동하는 인간은 자유를 잃고 나서 노예·농노, 그리고 노동자로 변해 왔다. 내재적 발전 운운해도 그건 스스로의 변신은 아니었다. 그를 사용하는 주인의 힘, 즉 그가 사용하는 무기와 신분, 그리고 권력에 따라 노동의 존재형태가 달라졌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노동의 주인은 자본이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를 사용하는 자를 사용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법원은 근로자는 사용종속관계에서, 즉 사용자에 복종해서 그 지휘·명령에 따라 노동하는 자를 말한다고 판결해 왔다. 주인에 복종해서 일해야 하는 자, 그가 노예와 농노였던 것이고 오늘은 노동자인 것이다. 도대체 달리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게끔 법적으로 규정했다. 추노꾼의 존재가 노예와 농노를 규정지었던 것이 아니다. 주인에 복종해서 노동하도록 강제했던 세상의 질서가 규정했던 것이다. 노비종모법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든, 아니면 빚에 의한 채무노예였든 그를 노예로 존재하도록 강제하는 저주스러운 세상의 질서가 있었다. 세상은 흘러 근대의 강을 지나, 현대에 흘러들어 왔다. 노예도 아니고, 농노도 아닌 노동자들로 세상은 온통 채워졌다. 근대의 선언은 노예제와 농노제를 저세상으로 보냈다. 계약자유에 의해서 노동계약 체결을 통해 인간은 이제 노동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 노동계약인 근로계약은 자유로이 태어난 인간을 사용자에게 복종하는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신분’ 계약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오늘 근로계약을 하는 노동자는 더는 노예의 현대식 이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추상화된 자본만큼이나 노동도 구체적인 인간을 떠나 있다. 자본주의 법제는 사용자 자본이 주식회사 등 법인의 존재형태를 취함으로써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숨길 수 있게 했다. 자본은 더는 착취자를 찾을 수 없게 주식·지분이라는 추상적인 형태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제 노동의 착취자조차도 회사의 임직원 신분으로 노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고, 착취당하는 노동조차도 주주로서 자본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언젠가 중국식 사회주의시장경제론을 읽은 적이 있는데 주식회사를 공유, 즉 공적 소유인 양 그리고 있는 걸 보고 놀랐다. 분명히 형식적인 모습으로만 보면 많은 사람이 회사 지분인 주식을 함께 소유하고 있으니 주식회사의 소유형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며 당시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 소유의 구체적인 지배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 그렇게 평가한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만큼 자본주의는 회사제도를 통해 소유의 혁신을 이뤄 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건 결코 사적 소유의 폐지가 아니라 사적 소유의 질적 발전 형태로 확장해 왔던 것이다. 분명히 여전히 세상은 노동하는 인간과 그 인간을 복종시켜 사용하는 자로 확대재생산되고 있건만, 법적으로는 뒤섞여 책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노동자권리·노동운동으로부터의 탈주의 변명이 시작되고 있다. <b>3.</b> 올해는 국제노동기구(ILO) 창립 100주년이다. 그래서 그걸 내세워 이 나라에서도 각종 행사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노동운동은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ILO 핵심협약 비준 공약의 이행을 촉구해 왔다. 각 나라의 노사정 대표가 참여하는 기구이니 ILO는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노동단체는 아닌 것이다. ILO 창립 직후 국제노동운동은 ILO에 결코 우호적이 아니었고, 심지어 적대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노동운동은 그 ILO에서 채택한 협약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이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ILO 목적 선언인 필라델피아 선언 등 노동자와 인민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국제 선언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시 급진적인 노동운동 등이 비난했던 협약·선언 등이 오늘은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것이라며 각 나라 노동운동은 이구동성으로 비준하고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흘러왔기에 이렇다는 것인가. 노동의 새 세상이라고 선언했던 사회주의 체제는 결코 노동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새 세상을 건설하지 못하고 붕괴했다. 수정자본주의 등으로 자본의 세상에서 노동을 위한 권리를 보장할 것을 기약했던 세상은 점점 노동의 자유와 권리를 팽개치고 광포한 시장전제주의로 달려가고 있다. 이제 노동운동은 기존 노동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데 안주하고 있는 지경이다. 어느 나라 노동자 운동이 새로운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내세워 투쟁하고 있나. 그저 몇십 년 전에 쟁취했던 자유와 권리를 두고서 오늘도 협상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의 퇴보가 어제 선언한 권리를 오늘 말하게 하고 있다. 노동의 진보에서 탈주한 세상이 오래된 노동의 자유를 새로운 것인 양 말하게 하고 있다. <b>4.</b> 나는 세상을 모른다. 오늘 종교적 유토피아도, 과학적 철칙도 이 세상이 나아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탈주한 세상이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겠다. 오직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고만 알 뿐이다.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세상은 결국 노동운동이 그려 나가면서 쟁취하는 세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 노동운동은 어떻게 그려 나가고 있다는 것인가. 쟁취해 낸 노동의 자유와 권리를 두고서 하는 말이 아니다. 노동자 스스로의 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은 어떠한 모습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만약 노동의 새 세상이 있다면, 그건 오늘 노동자의 운동에서 존재해야만 한다.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조직’ 노조운동 말고는 말할 수 없는데, 거기서 어떤 모습이 그렇다는 것일까. 특별히 노동운동이 다른 무엇보다도 더 실현해 내고 있는 것인가. 노동자 스스로의 운동이라면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주인으로서 결정하고 행사하는, 민주주의 원리로 철저히 운영돼야 한다. 단지 노동이 아닌 자본, 시민의 단체에서 행해지는 민주주의보다 더 철저한 민주주의가 노동운동 내에서 실현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지 단체의 이름만 무슨 사용자단체, 시민단체에서 노동단체로 다른 것일뿐, 그 운영원리는 그게 그거라면 노동의 내일은 별 볼 일 없는 거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과연 별 볼 일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표 대의제의 원리에 기초한 조직운영이 너무도 당연하게 노조규약에 규정돼 그에 따라 오늘도 노동자·조합원들은 임원을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는 사용자와 교섭하고 노조의 대내외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아마도 이 나라에서 단체들 중 가장 철저히 대의제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보인다. 대의제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의사에 따라 춤추는 대의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대표 선출 말고 스스로 주인으로서 노조의 의사를 결정하고 이를 집행하는 데 얼마나 참여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20·30년 전 민주노조 건설 운동이 한참이던 때에는 이러저러한 노조 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논의도 있었다. 오늘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단지 이 나라 노동운동만이 아니다. 더는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노동운동에서 실현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찾아볼 수가 없다. 세상의 탈주보다 두려운 것은 노동운동의 탈주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노동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노동자 스스로 운동으로서 노동운동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탈주하지 않는다면, 어떻든 세상은 노동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p class="auto-martop-20">김기덕 labortoday</p> <p class="auto-martop-20"><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p> </div> </div> </div></td> </tr> </tbody> </table> </div> </div></td> </tr> </tbody>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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